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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제도에서의 주거 및 문화 발달의 역사

오세아니아 군도는 지구에서 선사시대 인간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도달했던 지역이다. 또한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된 것도 연속적인 이주를 통해서가 아니라 가끔가다 한 번씩 한꺼번에 이동해오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서도 이주민들이 가다가다 한 번씩 꾸준히 밀려들어왔다. 한 번의 이주 물결이 끝나고 다음 이주가 시작되기까지는 오랜 고립기가 지속됐다.

 

이는 여러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상황 때문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발달 현상이 관찰된다. 즉 태평양 제도로 사람이 유입되고 시간이 지난 후 생산 경제가 도입되었던 과정은 모두 서서히 발달된 게 아니고 한 번씩 큰 자극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또 이스터섬과 하와이를 비롯한 폴리네시아 제도 동부 지역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늦은 시기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는 당시 인간이 태평양 지역을 점유해가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연속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행되었다.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는 대부분 열대에 속하며 뉴질랜드와 같이 아주 남쪽에 있는 곳만이 아열대 또는 온대 기후다. 태평양 제도의 군도들은 전체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던 시기에 서로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섬들에 비해 더 많은 종류의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이주민들에게 큰 장점으로 비춰졌다. 또한 면적이 넓은 섬에는 고도가 상당히 차이 나는 지역도 많았고 따라서 다양한 자연환경이 제공되었다. 이런 곳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했고 이는 이주민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모든 섬이 비교적 작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수렵 채집 생활의 식량 조달 방식을 생산 경제로 전환해야 했다.

 

이러한 전환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섬에서는 사냥과 채집을 위한 행동반경이 제한되기 마련이어서 언젠가는 식량 조달이 한계에 다다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농업의 도입과 더불어 식량 조달은 계획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 식물 경작과 가축 사육은 즉각적으로 수용되지 않았고 전파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이 태평양 군도 전체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인구 밀집도가 높아져 섬을 떠나는 이주민도 생겨났다. 이는 태평양 제도 전 지역이 개척되는 과정에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오세아니아의 인구 정착 과정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신빙성 있는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개별적 현상과 사건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연대 추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태평양 지역의 인구 정착이 장기간에 걸친 과정이었으며, 이때 인구 이동은 한 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집중적 이동 시기 사이에는 오랜 정체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오세아니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수렴 채집 생활에서부터 전문화된 농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량 조달 방법을 발달시켰다.


오세아니아에서 최초로 사람이 살게 된 시기는 3만5000년에서 2만 9000년 전, 플라이스토세 후기였다. 뉴기니의 동북부 해안에서 건너온 최초의 이주자들은 먼저 뉴브리튼 그리고 뉴아일랜드와 비스마르크 제도 주변의 섬으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플라이스토세 극빙기의 거대한 빙원에는 엄청난 물이 한데 얼어붙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보다 해수면이 40~70미터 정도 낮았다 는 점이다. 

 

당시 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직접 연결되어 사이라는 큰 대륙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동남아시아는 그 주변 섬들과 함께 순다라는 대륙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순다와 사흘 사이에는 좁은 해협이 가로놓여 있었고 이를 건너는 것은 플라이스토세 후기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스마르크 제도와 인근섬에도 파푸아뉴기니에서 배 또는 뗏목을 타고 이동해왔을 수도 있다.

 

섬들 간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고 뉴브리튼, 뉴아일랜드, 마누스와 같은 섬들도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다. 육안으로 다른 섬들이 보이는 군도도 많았다. 이 때문에 다른 섬으로 건너가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겼고, 육안으로 건너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바다를 건너기도 쉬웠다.

 

플라이스토세 후기(3만5000년 전에서 2만9000년 전)에 솔로몬 제도 가장 남단에 위치한 부카섬에서는 최초의 이주 흔적이 나타난다. 바누아투와 누벨칼레도니영어로는 뉴칼레도니아섬도 마찬가지로 빙하기 후기에 이미 호모 사피엔스의 발길이 닿았다. 하지만 그 밖에 더 멀리 떨어진 군도에 진출한 것은 기원전 1000년대가 지나서인 듯하다. 이 섬들에 도달하
기 위해서는 다른 항해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아는 한돛은 홀로세 중기 이전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발명된 후에는 항해술을 확실하게 혁신시켰다. 사람들은 돛단배를 타고 멀리 떨어진 섬 사이의 먼 바닷길도 빠르게 건널 수 있었고, 교역을 위해 필수였던 본격적인 선박 왕래가 일어날 수 있었다.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멜라네시아인들은 이동식 사냥채집생활만 하며 살았고 아주 적은 유적지(바위굴, 동굴)만 남겼다. 식량 조달 방법은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고기 공급량이 많기 때문에 크게 선호했던 대형 포유류는 더 이상 거의 사냥이 불가능했다. 

 

대부분 이미 멸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냥은 뱀, 쥐, 조류에 집중되었다. 또한 많은 야영지가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고 사람들은 풍부한 해양 자원을 이용했다. 열대 우림은 많은 식용 가능한 야생식물을 제공했다. 특히 늪이 있는 습지대에서는 야생 타로와 같은 덩이줄기 식물을 채집할 수 있었다. 또한 호모 사피엔스는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이미 울창
한 숲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불을 놓아 땅을 개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으로써 사냥을 쉽게 할 수 있었고 또 나무가 성겨지도록 하여 식량에 중요한 야생식물이 더 빨리 더 잘 확산되도록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플라이스토세 시기부터 찾았던 오세아니아 서부 지역 섬들에서는 약 2만 년 전 갑자기 이주가 단절되면서 생존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안가에 위치한 암굴과 동굴들은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그 대신 사람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섬 안쪽으로 들어가 더 높은 지대로 이동해 살았다. 

 

그때까지 거주민들은 계속해서 주로 고기잡이와 해양 자원의 채집에 집중해 살고 있었고 사냥과 식물 채집은 여전히 보조적 역할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라이스토세에서 홀로세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일어난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이전에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지역은 대부분 물에 잠겨버렸고 이 지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플라이스토세 만엽(기원전 1만1000년 전에서 기원전 8000년 전까지) 뉴질랜드와 솔로몬 제도에서 과실수와 호두나무의 이용이 증가한 것이 눈에 띈다.